여자가 이마에 쓴 숫자를 지우려고 거울 앞에 선 그는 그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을 느꼈다. 수수께끼 같은 붉은 코트의 여자가 필사적으로 잡으려 했던 인생의 한 조각이 그레고리우스라는 단단한 우주에 균열을 낸 것일까. 아니면 여느 때와 똑같이 시작한 그 날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문득 고개를 들어 베른 시 역사박물관 뾰족탑과 구르텐 산 그리고 푸른 빙하수를, 평생을 살아온 낯익음의 세계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것이 시작일까.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바꾸어 놓은 그날은 그렇게 시작했다. 비가 내린다는 것만 빼고는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그레고리우스의 삶이 우연의 실타래에 엮여들었다. 우연히 만난 여성을 돕고, 그 여성이 갈 만한 곳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마음을 빼앗는 책을 만났다. 그는 우연의 연쇄 속에서 발견한 무언가를,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가 무엇인지 알기위해 길을 나섰다.“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그레고리우스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미래를 향해 플랫폼을 떠나는 순간 정신없이 그의 여행에 빠져들었다. 그가 프라두를 만나 그의 흔적을 뒤쫓은 것처럼 나도 그레고리우스의 여행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풀어내는 그의 사유를 한 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동의가 됐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자세히 관찰하고 나에게 남은 시간을 헤아려 보는 순간 나는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레고리우스처럼 자신에게 남은 가능성이 얼마 없다는 판단을 한다면 떠날 수 있을 것인가.문득문득 “그 때 그랬더라면” 하는 가정의 세계에 빠져들곤 한다. “떠났더라면”, “만났더라면”, “했더라면”, “안했더라면”. 언제나 발은 굳건히 현재에 못 박은 채다. 희미해진 머리숱에 두꺼운 안경을 코에 걸친 초로의 그레고리우스에게 내가 매료된 것은 그가 가정과 체념의 세계를 우연을 핑계 삼아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순간을 잡아 챈 것일까. “하고 싶다”,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습관과 동거하는 우리는 매일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그레고리우스는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하는 교사다. 그는 과거의 언어를 전공으로 하고 자신의 성취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옛날 모습 그대로 유지되기를 고집했”던 그가 어느 순간 자신에게 다가온 낯선 빛을 놓치지 않고 그 의미를 찾아 짐을 꾸린 것이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일상의 자력을 이겨낸 그의 뒷모습은 절대 그 옷차림만큼 허름하지 않았다.프라두를 목적으로 한 그레고리우스의 여행은 어찌 보면 얻은 것 하나 없는 일탈이었다. 프라두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사로잡은 글을 쓴 사람을 만날 수 없었던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 그의 생을 한 조각씩 재구성해 나갔다. 프라두는 자신이 원하는 삶의 무대에 서려던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을 회고하는 인식의 예리함을 놓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가 발견한 프라두의 빛은 자신이 통과한 시간에 대한 성찰이었을 것이다. 프라두는 자신의 선택과 그 선택의 영향,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자신의 느낌에 대한 면밀한 관찰자였다. 프라두의 자취를 쫒는 과정에서 그레고리우스는 “불합리함과 피로, 과장된 쾌감과 경계를 넘어서는-지금까지 모르던-해방감이 섞인 상황”을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동굴에 갇힌 듯 정해진 경험만을 추구하던 그는 잃어버린 단어를 찾고, 자신의 욕망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존재를 찾아 나간다.“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평소에 자주 가던 익숙했던 일상의 냄새가 나는 장소를 돌아볼 것이다. 자꾸만 뒤돌아보게 될 것이고, 하지 않은 말을 할 걸 그랬다며 후회할 것이다. 그 때 독시아데스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결정에는 의미가 있다고, 길을 떠나 도중에 어찌해야할지 모를 때 언제든 전화하라고 말해줄 사람. 머뭇거리는 마음이 욕망하는 방향을 알아챌 수만 있다면 나를 현재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언젠가 벼락처럼 떨어지는 삶의 변곡점을 알아보게 되길, 그 순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할 용기가 내게 있기를 바란다.그레고리우스는 다시 낯선 문 앞에 서 있다. 의지와 관계없이 그의 시간을 암흑으로 만들곤 했던 현기증에서 비롯된 여행이다. 이 여행의 끝이 어디가 될지는 모른다. 도피와 같았던 첫 여행의 출발은 혼자였지만 병원 앞에 선 그의 곁에는 친구가 있다. 길을 잃어버려도 전화를 할 수 있고, 나를 잃어버릴지 모를 병에 대한 처방을 써줄 수 있는 친구 독시아데스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난 그의 이번 여행이 얼마쯤 따스한 것이길 바래본다. 그레고리우스는 친구에게 손을 흔들고 문으로 들어선다.다시 비가 내린다.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리스본행 야간열차 가 던진 화두다. 작가는 계속해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라고 묻는다. 철학적이며 실존적인 질문이다. 베를린자유대학 철학과 교수이자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는 이 문제를 문학이라는 틀 안에서 풀어내 독자와 평단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은 베를린자유대학 철학과 교수이자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의 작품으로 2004년 출간 이 후 23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작품은 근본적인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독일 문학사상 막스 프리쉬의 작품과 비견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삶에서 일탈해 전혀 다른 삶을 좇아간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다른 삶에 대한 희구는 현실에 대한, 표현되지 못한 내면의 저항이 아닐까? 혹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미 만들어진 나를 다시 만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작가는 프라두의 입을 빌려 글쓰기를 실존과 언어의 문제로 바라본다. 내가 인식하는 자아와 타인의 눈에 드러난 자아, 남이 말하는 나와 내가 말하는 나, 현재의 삶을 경험하는 나와 감추어진 삶을 지향하는 나 사이의 간극. 작가는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 점에서 그는 나보코프나 카프카와 비견된다. 그러나 현란한 은유와 지성의 언어로 사유의 세계를 넘나드는 대목은 움베르트 에코가 떠오를 정도다. 이는 메르시어가 오랫동안 언어와 철학의 문제에 천착해온 학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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