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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포도밭


이 책, 많이 힘들게 읽었다. 문장 하나에서도, 전체적인 흐름에서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서 한 문장, 한 문단을 되풀이해 읽으면서 글에 담긴 뜻을 해독하느라 시간도 꽤 썼고 마음 고생도 적지 않게 하면서 읽었다. 지금도 일리치와 후고의 언어를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이 리뷰를 쓰고 있는 것일까 하는 부족함이 느껴진다. 특히나 첫 번째 장의 이해의 어려움이 심했다. 다른 분들의 리뷰를 보면 쉽게 잘 읽은 것이 보여서 그 역량에 대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의 구성을 보면 머리말을 포함한 본문이 185쪽이고 주석과 참고문헌이 140쪽에 달한다. 깨 알 같은 주석을 들춰보면 일리치라는 인물에 대해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한 문장 안에도 주석이 여럿 달려서 주석을 읽다가 지칠 정도로 꼼꼼하게 부가 설명이 붙어 있다. 일리치의 지극한 정성과 이해의 깊이가 전달되어온다. 일리치는 이 책을 쓴 목적이 ‘학문적 기여를 하려 함이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는 새로운 통찰을 얻었던 과거의 한 시점에 다가가도록 안내하기 위함 (p. 16)’이라고 밝힌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한 텍스트가 성 빅토르의 후고가 쓴 [디다스칼리콘]인데 이것이 읽기 기술에 관해 쓴 최초의 책(p. 16)으로서 일리치는 중세의 독서 습관에 대한 역사적 행동학과 더불어 12세기에 이루어지던 상징으로서의 읽기의 역사적 현상학을 제시함으로써 수도사식 읽기에서 학자식 읽기로의 이행이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매우 다른 이행에도 약간의 빛을 던져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p. 14) 이라고 그 선정의 의의를 밝힌다. 이런 내용이 나오는 머리말에는 컴퓨터를 비롯하여 읽고 쓰기가 가능한 다양한 매체의 등장이 책 중심의 읽기의 근간을 흔드는 상황에서 과거의 수행 방식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일리치의 의도가 명시되어있다. [디다스칼리콘]은 초보자를 위해 쓴 책(p. 54)임을 일리치는 밝힌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부분들도 많이 등장한다. 이해력의 차이가 이렇게 나는 것인가 싶어서 살짝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후고는 훈련된 기억이 읽기의 전제 조건으로 중요하다(p. 60)며 고대 이후로 무시되었던 기억 훈련 기술을 복원(p. 59)한 사람이니까 내 수준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래는 수밖에. 그가 되살린, 책에서 길게 언급하는 기억 훈련 기술이 내게도 장착되어 있다면-초보자 수준만이라도- 조금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든다. 책은 읽기의 기술과 기억 방법에 대한 일종의 미시사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어떻게 기록하고 어떻게 필기, 필사해서 결과물을 남겼는지에 대한 작은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평소에는 간과하고 지나치는 인쇄술의 발명이 준 편의성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인쇄가 아니라 그보다 열두 세대 전에 일어난 이 한 묶음의 혁신이 그 이후 책 중심 문화가 거쳐간 모든 단계의 필수적 기반이다. (p. 13) 물론 다양한 매체의 발달이 책 중심 문화를 다시 변혁시킨다는 점에 대해서는 달리 이의를 달지 않지만 아직 종이 책이 편한 나로서는 인쇄술의 가치를 낮추어볼 수 없다. 그 인쇄술이 이 책을 보게 하는 기반이기도 하고. 책은 언어와 관련된 다양한 알 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단어가 알파벳의 창조물 (p. 61)’이라는 설명과 관련된 일련의 내용 같은 것들에서는 생각의 전복이 일어남을 느끼기도 했다. 이 부분은 왜 일리아스 등에서 ‘용사’, ‘극강의 전사’ 따위로 쉽게 표현하지 않고 ‘정강이 받이가 아름다운 인간 (정확한 옮김인지는 나중에 확인)’ 등으로 나타냈는지 흐름을 이해할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종류의 ‘단어’라는 말은 언어의 다른 구문적 구성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알파벳이 사용되고 나서 첫 수백 년 동안 그 밑에서 부화한 후에야 의미를 얻었다. (p. 61) 그레고리오 성가가 유대교 회당의 성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중세 수도원 생활의 치열했던 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덤이다. 어렵게 읽었고 그래서 특히나 전체적인 내용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 계속해서 의문이 생기지만- 첫 장을 넘어서서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정도가 다소 나아졌다-, 책에는 머리와 마음 속에 잘 담아두고 싶은 경구도 많고 깨우침을 주는 가르침도 많다. 찬찬히 스스로 떠올려보면 내 안에도 그런 말과 가르침이 숨어있다가 끄집어 올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학식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읽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말을 구하고 마치 거울을 얼굴 앞에 두듯이 그들의 말을 늘 정신의 눈앞에 두려고 열심히 노력하라” (p. 43) 진정한 자유 시간은 지혜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p. 94) 다 아는 얘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후고가 [디다스칼리콘]에 남긴 글로 마지막 순간까지 늘 배우고 익히려는 마음가짐을 다잡아본다. ‘수련의 시작은 겸손이다…. 겸손이 읽는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특히 중요한 교훈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어떤 지식이나 글도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어떤 사람에게 배우든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스스로 배움을 얻었을 때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책의 내용은 상당히 의미가 있지만 이해에 난항을 겪은 점을 감안하여 내용에 별 4개, 약간의 오타 등을 감안하여 편집/구성에 별 4개를 부여한다. P.S. 개인적으로는 이반 일리치의 여러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두고는 계속 구입을 미루어오던 상태였는데 이 책으로 일리치 읽기의 물꼬를 텄다는 의미가 남는다. 여전히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부담감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지만 망설임을 멈추고 일리치 읽기를 계속할 참이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누군가가 후고의 [디다스칼리콘]의 라틴어 원본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펴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너무 늦지 않게 그런 일이 실현되기를 희망한다. ※ 늘 하느님이라고 표현하다가 131p에서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작지만 아쉬운 실수이다.
책은 지식을 전달하는 참고서인가?
공부하는 사람은 많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없는 시대
온몸으로 읽는 수도사들의 읽기를 소개하다!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이반 일리치
독서법에 관한 최초의 책을 통한 오늘날 읽기 성찰!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 (타임스), 어떤 위치에서든 총을 겨눌 수 있는 지식의 저격수 (뉴욕 타임스),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 (가디언) ……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는 수많은 수식어를 동반하는 논쟁적인 사상가이다. 12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사회학, 철학, 신학, 역사학, 과학기술 등 많은 분야에 영향을 끼쳤고, 살아 있는 인간의 복원을 위해 주류적 흐름에 반하는 대항 연구와 지식 운동을 전개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현대의 모순과 비인간화된 사회를 폭로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학교 없는 사회 , 병원이 병을 만든다 , 전문가들의 사회 등을 통해 ‘학교가 교육을 망치고’, ‘병원이 병을 만들고’, ‘전문가들이 우리를 불구로 만든다’라는 급진적인 메시지를 던져왔다. ‘일리치 열풍’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책과 사상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졌지만, 생애 후반 20년은 잊혀진 듯했다. [ 1970~1980년대 한동안 일리치 열풍이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일리치를 읽지 않는 듯하다 (평화운동가, 더글러스 러미스)] 2002년 사회적 모순에 대한 그의 첨예한 비판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어 언론들은 새로이 일리치를 언급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도 ‘이반 일리치 전집’이 출간, 그의 사상을 탐구하는 철학 강좌가 열리는 등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살아나고 있다. 전혀 나아지지 않는 현대 사회의 각박함이 일리치를 21세기로 ‘강제 소환’해 고전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국내 처음 소개되는 일리치의 대표작 텍스트의 포도밭(In the Vineyard of the Text) (1993)은 흥미롭게도 독서에 관한 책이다. 일리치는 12세기 수도사 후고가 쓴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 을 해설하며 포도 맛을 음미하듯 읽는 지혜로운 책 읽기의 전범을 보여주고, 그 이후 12세기 전반에 걸친 책의 탄생과 책 읽기의 변화 문제를 깊이 있게 천착한다. 일리치는 읽는 방식이 곧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무미건조하게 지식을 습득하는 용도로 전락한 현대의 독서법, 많은 지식과 가벼운 읽을거리로 가득한 인터넷 공간을 비판하며 오늘날 ‘읽기’에 관해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머리말

1. 지혜를 향한 읽기
인시피트
아욱토리타스
스투디움
디스키플리나
사피엔티아
루멘
거울로서의 페이지
새로운 자아
아미치티아

2. 질서, 기억, 역사
어떤 것도 낮추어 보지 마라
오르도
아르테스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보물 상자
기억의 역사
기도 예배에서 사용하는 법률가의 기술
지혜의 서곡으로서의 기억 훈련
기초로서의 이스토리아
모든 피조물은 잉태 중이다

3. 수사의 읽기
묵상
중얼거리는 자들의 공동체
포도밭과 정원으로서의 페이지
생활 방식으로서의 렉티오
오티아 모나스티카
렉티오 디비나의 죽음

4. 라틴어 ‘렉티오’
라틴 수도원 생활
그레고리오 성가
라틴어의 문자 독점

5. 학자의 읽기
후고, 서문을 덧붙이다
읽을 의무
빈약한 수입에도 불구하고
수사 신부는 렉티오를 통해 교화한다
페이지 넘기기
새로운 성직자, 문자를 독점하다
소리 내지 않고 읽기
학자의 딕타티오
6. 말의 기록에서 생각의 기록으로
테크놀로지로서의 알파벳
발화의 흔적에서부터 개념의 거울까지
이야기에 대한 주석에서 주제에 관한 이야기로
오르디나티오: 눈에 보이는 패턴
스타침 인벤니리: 즉각적 접근
알파벳 색인
저자 vs. 편찬자, 주석가, 서기
레이아웃
일루미나티오 vs. 일루스트라티오
휴대용 책

7. 책에서 텍스트로
대상으로서의 텍스트의 역사를 향하여
텍스트의 추상
링과와 텍스투스
만물은 잉태 중이다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